본문 바로가기
책리뷰/예배

[책리뷰] 제임스 스미스 -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예배, 세계관, 문화적 형성)

by 카리안zz 2020. 3. 25.
반응형


느낀 점

 2018년 신학책 중에서는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책이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도 아니고 욕망이라니. 욕망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나에겐 이 책의 제목이 상당히 낯설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듣는데 이때 욕망은 포스트모더니즘에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단어라고 했다. 읽어보니 왜 욕망이여야 하는지 알겠다.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소화한 부분을 옮겨보겠다. 

 

여태까지의 기독교 세계관 교육

 저자는 여태까지의 기독교 세계관 교육을 말한다. 가장 공감되었던 부분이 근대적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기독교 세계관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부분이다(58~60). 나도 여기에 대해서 깊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형적인 근대의 교육, 주입을 하면 그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상당히 거슬렸다. 전형적인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 그랬다. 대표적인 기독교 세계관 교과서라고 불리는 제임스 사이어의<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보자. 이 책이 딱 근대적으로 책을 표현했다. 

 

이 세계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서양에서 세계관을 공부하신 분들은 크게 8가지 세계관으로 분류를 한다. 1) 기독교 유신론 2) 이신론 3) 자연주의 5) 허무주의 6) 실존주의 7) 범신론적 일신론 8) 뉴 에이지 9) 포스트모더니즘. 그렇다면 이 세계관들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일곱가지 질문을 던져서 이 질문에 답을 달 때 알 수 있다고 한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곧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명제적으로 곧, A는 B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세 번째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로 말해보겠다. 기독교 유신론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 존재로 본다. 이신론에서는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으로 본다. 자연주의에서 인간은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저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다. 허무주의(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본다.
이러한 ‘A는 B다’로 접근하는 명제주의는 너무 철학적인 냄새가 난다. 비교해서 서로의 세계관을 파악하기에는 좋은데 신앙인의 삶으로까지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이성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근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다음 나온 것이 내러티브적 접근이다. 즉,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이다.

 작년 기독교 세계관 강의 내용이다. 전형적인 명제적인 접근을 한다. 그러기에 이런 명제를 알기만 하면 자신에게 바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미묘한 믿음이 보인다. 쉐퍼가 그렇게 변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당신의 세계관이 모순된 것을 알게 된다면 기독교로 설득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쉐퍼의 착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로 신천지 신도들을 들어보자. 그들이 지식적인 부분 때문에 신천지에 빠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마음의 욕망이 작동했다고 본다. 그리고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고 그들과의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그 신천지라는 공동체를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했다(Jtbc에서 신천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대담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고 다수의 신천지가 이렇다고 영상에서 들었다). 나는 이들이 이성적인 부분보다 정서적인 부분이 더 먼저라고 생각한다. 

 

욕망하는 인간

 그렇다면 제임스 스미스가 주장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그는 책의 제목에서처럼 욕망을 강조한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인간관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의 방식으로 세계를 지향하는 지향적 존재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욕망이나 갈망의 구조를 취하는 사랑의 주체들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말과 같다. 사람이라는 것은 곧 사랑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피자나 보스턴 레드삭스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처럼 사소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부모나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처럼(비록 이런 사랑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 안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궁극적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사랑, 좋은 삶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사랑, 우리의 세계-내-존재를 형성하고 빚어내는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욕망하는 것, 우리의 다른 모든 이차적인 욕망과 행위를 형성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궁극적인 욕망을 말한다. 
 이런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혹은 종교적이면서 고대적인 언어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다. 이것이 사랑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지향성이 일차적으로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다. 내 삶을 아래로부터 형성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나의 열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러한 근원적, 궁극적 사랑-비록 우리가 이에 대해 실제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에 의해 정향되는 피조물이라는 뜻이다. 사실, 때로는 이 보이지 않는 선반성적 욕망은 우리가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다. (72-73)

 

 이 부분이 아마 제임스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일 것이다. 이 욕망은 몸에 형성된다. 제임스 스미스는 습관을 말한다(그래서 그의 책 중에 <습관이 영성이다>가 있다). 그는 쇼핑몰을 예로 든다. 백화점과 같은 소비하는 곳은 인간의 욕망을 건드린다고 말한다. 일단 상상하게 만든다. 이 상품을 내가 가진다면 내 세상에서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광고를 한다. 즉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마치 화장품 모델이나 쇼핑몰 모델이 입은 옷을 보면 우리가 마치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쇼핑몰에서 그 대상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듣고 하면서 우리의 몸은 마치 그 욕망으로 형성되어 간다. 이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예전으로 볼 수 있다. 습관이 형성된 몸은 욕망으로 인해 움직이게 된다. 즉 소비하게 된다. 

 다른 예로, 국가주의에 대한 의례를 든다. 30대인 나에겐 이 말은 익숙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군대를 다녀왔기에 의례에 익숙하다. 여기에 대한 예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영화 <국제시장>에 있다. 서로가 막 싸우고 있다가도 국기가 올라가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을 해 싸움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예전이며 국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에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런 몸으로 형성된 예전이 뭐가 있을까? 나는 서열의식이라고 본다. 한 예로 누군가 서울대를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와~!"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나인데도 서울대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감탄사가 나온다. 우리는 이미 초중고등학교때부터 서열화를 몸에 새긴 결과라고 나는 본다. 

 

예전 

 이제 제임스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 감이 잡힌다. 그는 예전을 강조한다. 몸을 형성시키는 습관을 예전을 통해서 기를 수 있다고 본다.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몸의 감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한다. 2부에 주로 그러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는 반신반의다. 그럼에도 예전에 대한 강조를 나 역시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예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호세아서를 강의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조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 싶다. 우리 깊숙한 마음속 욕망을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자고 말이다. 우상을 사랑한 자들은 그렇게 몸이 형성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몸이 형성될 것이다. 물론, 그 몸은 다 똑같은 모습의 몸은 아닐 것이다. 각자 몸의 흔적이 남길 소망해 본다. 

 

나가면서

 제임스 스미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여지길 바랬다. 작년에 고려대 베리타스포럼의 주 강사로 왔고 어느 정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슈를 끌었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교육에서 그의 논의를 좀더 다뤄봤으면 좋겠는데 그정도까지는 아니여서 아쉬웠다. 물론, 그의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드려질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내 친구는 제임스 스미스가 반문화적 메세지를 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임스 스미스는 이 책의 각주에서 친절하게 그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한달에 한번 첫주에 성찬을 한다. 중고등부 아이들이 꼬박 참석하는데 2년째라고 한다. 일 년차는 정말 아이들이 못견뎌했단다. 하지만 매주 훈련으로(?) 인해 견딜 수 있는 몸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내 나름으로는 교육에서 적용되는 것을 본다. 

 제임스 스미스! 흥미로운 철학자이며 개혁주의자이다. 올해 그의 3부작만큼은 다 읽어보고 싶어진다. 


메모

하우어워스와 리플린의 내러티브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77)

- 하우어워스의 <교회됨>에서 내러티브를 강조한게 이런 맥락일까?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기 때문?

 

 

 

 

이 비평은 신학에 대한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비판, 즉 형성에 관한 신학자들의 주장이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그리고 입증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87)

- 방금 내가 생각한 '검증되었니?'라는 생각을 정말로 했구나ㅋㅋㅋ

 

 

 

이를 닦는 것은 자동화된 활동일 수 있지만, 이는 자동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차원' 혹은 다양한 목적과 습관, 실천을 구별하는 해석적 장치를 임시로 도입해 볼 수 있다. (118-119)

- 내 생각을 읽었나?ㅋㅋ 단순 습관과 성품의 습관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경우 온동이라는 얇은 실천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성례전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두꺼운 목적에 기여한다. (120)

- 근데 운동한다고 마음이 생겨날까? 

 

 

 

그저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언제나 나쁜 생각인 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영화가 그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데 그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66)

- 모든 것을 반대(영화도 안 되고, 미디어도 안 되고)하는 것으로 이해할 소지가 있음. '세상=세속=나쁜 것'이라는 잘못된 등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의도는 '문화 전쟁'의 정신에 입각해 문화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다. (191)

- 문화전쟁은 아니다. 나의 염려에 대한 대답을 제임스 스미스가 해주었다. 

 

 

 

이러한 '주일을 넘어서는 실천'은 삶의 방식을 미리 연습할,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고 연습할 또 다른 기회다. (325)

- 제임스 스미스가 한국에서 '특새'를 겪어보면 어떻게 반응할까...ㅎㅎㅎ


책 맛보기

 

즉, 쇼핑몰은 세상이 깨어져있다고 이해하며, 이런 이해는 죄 고백이 아니라 소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록 피상적인 차원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쇼핑몰에서의 '죄'에 대한 등가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42)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