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소설

[책리뷰] 이민진 - 파친코 1[ 문학사상, I Min Jin Lee, Pachinko]

카리안zz 2022. 9. 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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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주 강렬한 첫 문장이다. 근래 본 첫 문장 중 가장 압권이었다. 파친코1에서는 말 그대로 역사가 망쳐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백이삭 목사의 큰형 백사무엘 목사는 1919년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그의 동생들인 백요셉, 백이삭 역시도 역사에 망쳐진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이 역사라는 큰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들의 개인사가 펼쳐지고 있는 점들이 흥미로웠다. 선자의 아버지 김훈은 언청이었고 뒤틀린 기형아였지만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며, 특히 그의 딸 선자로부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며 따스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기억에 남는다(72, 117). 선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마치 자신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에 투영해서 생각하기까지 한다. 선자의 어머니 김양진 역시 가난한 집에서 먹을 것도 못 먹여 죽을 바에야 밥이라도 챙겨 먹을 수 있는, 그리고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먹을 양식이 있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언청이에다가 뒤틀린 기형아였음에도 말이다.

이런 작은 이야기에서부터 점차 역사의 큰 줄기가 이 가족들에게 뻗쳐나간다. 역사책은 아니지만 일제 시대 조선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목사라서 그럴까 신정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보이는 것같다. 아님 내가 목사여서 그런 거 일수도.

““좋은 신이라면 제 자식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낍니더. 그런 신은 믿을 수가 없어예. 제 자식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만일 우리가 옳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면 우주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셨을 겁니다. 우리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겠죠.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 많답니다.”
양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점차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 같았다.”(96-97)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 하실 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거야. 우리가 홀로 고통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게 말일세.”(105-6)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포라서 줄임)...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는 달랐다.”(271)


백이삭 목사의 대답은 전통적인 교회의 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백이삭 목사는 말만 하는 그렇고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부자집 자제로 태어나 상류층이었지만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사람이었다(123). 그런 그를 양진의 집 하숙인 정씨 삼형제는 참 좋아했다. 냄새나고 가난한 삶을 사는 어부 정씨 삼형제를 백이삭 목사는 친절하게 대했다.

오사카로 간 백이삭 목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괴리를 느낀다. 가족이 생겼고 이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오사카의 교회에서는 백이삭 목사가 상류층이기에 부른 것이기도 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자신들의 교회에 맞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례를 할 수가 없었다. 혼자라면 상관없었지만 백이삭 목사는 가족이 생겼기에 고민을 한다(226). 둘째 형 요셉은 철저히 현실에 순응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뭔가 더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236) 백이삭은 자신의 큰 형처럼 목숨을 거는 큰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가족이 생기고 고민을 한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이삭 목사는 처절한 삶을 선택한다.

“이 녀석아,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니? 사실이 아니라도 천황을 숭배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293)


조선인들의 현실이 그랬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몰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267)

“조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당신보다 더 절박한 상태라고. 그들은 한 주나 지난 빵을 얻으려고 일을 해. 여자들은 이틀 굶주리고 나면 창녀가 되지. 먹여 살릴 자식들이 딸려 있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341-2)


처절한 현실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게 욕 먹을 짓이던가? 현실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자 처절하게 살아가는 게 욕 먹을 현실이던가?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시키며 위대한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자. 물론, 그들의 선택에 악인들을 선택한 자가 아닌 선택한 자의 가족을 볼모로 난도질했다. 가족이 희생시킨다. 가족을 걸고 넘어지면 제 아무리 강한 사람도 흔들린다. 옳은 일을 하려는 사람을 비난해야 될까, 가족을 볼모로 죽이는 자들을 비판해야 될까? 당연히 후자이겠지만 내 현실이라면 그렇게 당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희생당하는 가족이라면. 그리고 모두가 몰락해버린다면. 그래서 요셉이 했던 말인 “이 녀석아,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니?”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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